부부 상담을 진행한지 어엿 13년의 시간이 지났고 그 동안 1만명의 다양한 부부를 만나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시간에서 인간의 고통이 관계와 정서의 문제로 귀결됨을 알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인간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란 추기경님의 말씀을 나 역시 체험하는 인간에 대한 경이로움과 상담자로서 겸손함을 익히는 시간이 되었다.
다양하고 수많은 부부의 삶의 경험에서 겪는 고민은 상담사인 내게도 도전적 과제가 되었다. 상담을 공부하며 많은 이론을 익히지만 상담사란 직업은 그런 서술적 지식을 절차적 지식으로 풀어내야하는 역량을 요구한다. 그래서 많은 서술적 지식을 갖추었다는 것이 곧 훌륭한 상담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임상적으로 절차적 지식을 갖추었지만 서술적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 그 또한 훌륭한 상담사로 자리 매김할 수 없는 갭이 생긴다. 상담사란 직업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서술적 지식과 절차적 지식이 교류하는 현상학적 장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부부는 상담자가 누구의 귀책으로 가정에 갈등이 지속되는지 분별해 주기를 바라거나, 자신들의 갈등을 해결해 주길 기대하고 온다. 상담자는 그들의 다툼을 판단하는 판사도 아니고 해결해 주는 해결사도 아니다. 다만 나는 10년의 정신역동이론 공부를 하며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보다 그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심리구조를 변형시켜주는 정신역동 상담을 하고 있다.
상담자 역시 내담자의 삶을 통해 세상을 보고, 내담자 역시 상담자를 통해 세상을 만난다. 상담을 통해 상담자와 내담자가 되지만 상담은 서로에게 삶의 지평을 여는 과정이 된다. 상담은 상호적 관계를 통해 내담자의 경험이 재구성되는 과정이 된다. 그렇게 지난 13년간 10000쌍이 넘는 부부와 상담하며 내담자도 상담자도 함께 성장한 사례들이 스쳐지나간다.
유복한 가정에서 엄친 딸로 성장해 결혼을 한 잘 나가는 전문직 여성에게 결혼 6년차에 위기상황이 발생했다. 남편의 외도, 이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태도에 상처받아 6살 된 딸을 데리고 혼자서도 잘 살아갈거란 자신감을 갖고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 후 4년간 딸을 혼자 키우며 아버지의 부재가 딸에게 어떤 것인지 뒤늦게 발견하게 되어 딸에게 아버지를 만들어 주고 싶어 재혼을 결심했다. 주변에 재혼을 할 남자를 찾다 보니 자신처럼 이혼해서 아이를 양육하는 남자들이 있었고, 그런 남자와 결혼하면 자신의 딸에게 온전히 헌신해 주지 못할 것이고 자신도 그 남자의 아이에게 엄마 노릇을 해 줘야 하니 온전히 내 딸에게 몰입할 수 없을 것 같아 내 딸에게만 온전히 아버지 역할을 해 줄 남자를 찾아 25살 차이나는 초로의 남자와 재혼했다.
그런데 재혼 10개월 만에 남편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딸을 친아버지에게 보내던지, 친정에 맡기던지 그래야 자신과 결혼생활이 유지 될 수 있을 거라며 2달 내로 결정하라는 통고를 했다. 내담자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상담실을 찾았다. 그리고 내담자는 자신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상담자에게 답을 달라고 매달렸다.
내담자는 상담을 하며 자신이 이혼을 할 당시 아이의 삶을 고려하지 못한 자신을 봤고, 재혼을 결정할 때는 딸에게 아버지를 만들어 주기 위함이 기준이었지만, 지금 이 재혼을 유지하느냐 마냐의 기로에선 딸보다 자신이 두 번 실패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우선인 자기를 만났다. 언제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이 중심이었고 상대의 욕구는 고려되지 않는 일방적 관계 맺음을 직면했다. 나의 관계 맺는 방식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상대는 나에게 어떤 소망을 갖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일방적 관계 맺기만 해온 내담자는 자신의 관계 맺기 방식으로만 판단하니 재혼한 남편이 일방적으로 제안한 그 방법을 따르던지 아니면 다시 이혼을 하던지 경직된 방법에 갇혀 있었다. 재혼한 남편의 욕구가 무엇인지 그 욕구는 배우자로서 어떻게 만족시켜줘야 하는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부부 관계에서 조율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경직되어 있는 자신의 대처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욕구가 상대를 통해 채워지기를 원하면서 상대도 자신을 통해 채워지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음을 간과하고 살아온 삶에 대한 자신을 이해하면서 재혼한 남편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상호적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딸에게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물리적 아버지의 존재를 갖게 해 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자신이 원했던 딸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채워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명료해지면서 심리적 아버지로 전 남편을 어떻게 딸에게 뿌리내려줘야 하는지도 인식하게 되었다.
모든 내담자들의 삶의 행동에는 모두 각기 다 다른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상담에서 상담자는 다양한 내담자의 현상학적 장에서 내담자를 존중하고 공감하며 경청한다. 그 과정에서 내담자는 자신의 신념과 정서를 만나게 되며 자신의 행동 동기를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 주관적 관점의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 내담자는 객관적 관점의 자기를 만나게 된다. 상담사는 모든 내담자의 모두 다른 동기를 만나고 접하며 인간의 행동동기에 각자의 역사가 미친 그 행동을 이해하는 과정에 함께 동참한다. 함께한다는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며, 내 이야기를 무조건적으로 경청해 준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한 인간으로 온전히 수용되는 경험이며 세상을 신뢰하는 시간이 되고, 이 과정은 생명력 있고 활기차며 응집력 있는 자기로 회복되는 치유의 시간이 된다. 그렇게 온전히 자신이 수용된 경험은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어지고 자기에 대해 세상에 대해 타인에 대해 수용된 태도를 갖추게 된다. 부부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를 더 수용하며 환상의 배우자가 아닌 현실의 배우자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